새벽잡담-슬렁슬렁 걸어가 국밥 한 그릇 비우다


내가 술자리를 자주 가지는 건 세상에 대해 말을 거는 소통의 의미도 있지만 술 마신 다음날 쓰린 속을 부여 잡고 저린 몸을 추스려서 멍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슬렁슬렁 걸어가 국밥 한그릇 먹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식당에 가서 이름도 모를 비싼 요리를 먹어도 패밀리레스토랑에 가서 립을 뜯어도 한우 안창 등심을 쌓아놓고 배 부르게 구워먹어도 어찌나 입이 머슴인지 -_- 펄펄끓는 쇠고기국밥이나 김 모락모락 나는 콩나물국밥 한 그릇 뚝딱 해치우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제, 어제는 무척 행복한 날이었다. 술을 진탕 퍼마신데다 다음 날 쓰린 속을 콩나물 국밥으로 달래줬으니까.

사실 내가 합정동으로 이사온 후 아쉬웠던 것 중 하나가 사무실 근처에 콩나물국밥집이 없다는 거였다. 전날 술은 마셨지 속은 쓰리지 암만 주위를 찾아봐도 쇠고기국밥집이나 콩나물국밥집은 없지. 그럼 나는 어쩔 수없이 해장라면을 먹거나 굴국밥이나 선지해장국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야만했다. 그러다 정 못참겠으면 홍대주차장골목에 있는 전주남부식콩나물국밥집으로 달려갔다. 조금만 늦어도 자리가 없어 10분 20분 기다리는 것은 예사고 다닥다닥 붙은 탁자가 좁아 어깨를 움크리고 먹어야 했지만 난 참을 수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맛있는 콩나물국밥을 먹을 수 있었으니까.

이 집은 삶은 오징어를 어슷어슷 쓸어 국밥위에 얹혀 나오는 전주 풍전집 스타일인데 내가 이 집에서 국밥을 먹는 방식은 이랬다.
자리가 나면 잽싸게 한자리 차지하고 앉아 얼른 모주한사발을 시킨다음 전날 술로 인해 쓰린 속을 달달하고 씁스레한 모주로 일단 달랜다. 그러고 있다보면 반쯤 익힌 수란이 한종지 나온다. 따라나온 김을 부셔 솔솔솔 수란위에 뿌리고 뒤이어 나온 국밥 국물을 두수저쯤 넣고 마시는 듯 후르륵후르륵 먹으며 남은 모주를 비운다. 써리김치가 들어간 국물을 한번 떠먹고 밥 한수저 뜨고 장조림 하나 먹고 또 밥 한수저 떠서 김에 싸먹는다. 그렇게 번갈아가며 먹다보면 어느새 국밥그릇은 비워지고 속이 확풀리고 행복해졌다. 가격이 5,000원이라 좀 비싼감은 있었지만 맛있는 콩나물국밥 한그릇 먹는데 5,000원이 대수랴.

하지만 매일 술을 마신다고 -_- 매일 그 집에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난 늘 조금씩 허전했고 아쉬었다. 그리고 그렇게 지난 1년의 세월을 보내왔었다. 그러다 열흘전쯤 재훈이형네서 술을 한잔 마시고 나오다 형네 집 들어가는 입구에서 눈이 뻔쩍 뜨이는 광고판을 하나 발견했다. 콩나물국밥 11월 8일 오픈!!! 3,500원.

그날이후로 나는 11월 8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왜 신장개업하는 집이 월요일이 아니라 화요일이냐고 투덜거리고 중부식일지 남부식일지 완산정 스타일일지 풍전집 스타일일지 삼백집 스타일일지 고민하고 3,500원이면 가격이 싼데 맛 없으면 어쩌나 걱정하고 이러다 설마 어느 날 갑자기 업종변경이라는 포스터가 붙을까봐 마음 졸이면서. -_-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전날 술을 엄청 퍼마셔 국밥 먹을 몸은 이미 만들었겠다. 이제 국밥만 먹어주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하며 보무도 당당하게 슬렁슬렁 국밥집으로 향했다. 계란이 국밥에 풀어져 나오는 삼백집 스타일이었다. 아싸! 좋구나.
하지만 그 기쁨도 잠깐.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그만 새우젓간을 맞추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_- 간이 안 맞는 콩나물국밥을 먹는 건 전날 술도 안마신 주제에 콩나물 국밥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 -_- 간 맞추기에 실패한 콩나물국밥은 연애도 못하는 모 출판사 편집장과 동격. -_- 나는 눈물을 머금고 콩나물 국밥을 비워나갔다. 하지만 삼백집 스타일의 콩나물 국밥에 맞는 먹는 법을 머릿속으로 요모조모 궁리하며 다음을 노렸다. 그리고 퇴근 후 다음 날 국밥 먹을 몸을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7시간 술을 마셔줬다. -_- 그리고 날이 밝았다.

막 파리에서 돌아 와 입안에 느끼함을 가시기 위해 국밥 한그릇이 필요할 도로시와 디자인 팀을 이끌고 국밥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전날 궁리한대로 국밥을 먹었다.
펄펄끓는 콩나물국밥에 약간의 새우젓으로 간을 한다. 청량고추로 만든 다대기를 풀어넣고 콧등에 땀이 배어나올 정도의 알싸한 맛을 즐기며 그릇을 반쯤 비운다. 남은 국물에 깍두기와 깍두기 국물을 넣고 아직 따뜻한 국물에 반쯤 익은 깍두기를 아삭 한입 베어 먹는다. 주변사람 눈치 안보고 벌건 국물을 들이키다보면 어느새 몸이 달아오른다.
내 예상이 맞았다. 그릇이 비워지는만큼 쓰린 속도 저린 몸도 멍한 머리도 어느새 사라져갔다. 그리고 바보같이 활짝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행복하게 국밥 한그릇을 뚝딱 비우고 슬렁슬렁 걸어오면서 생각했다. 국밥 먹는 재미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밤새 오케이 교정을 보고 새벽에 소주를 징하게 마신 후 빈 속을 국밥 한그릇으로 달래는 재미, 내가 술을 마시는 건 말이야 단지 내일 국밥을 먹기 위해서라고 호기롭게 소리치는 재미, 전날 아무리 우울한 일이 있었더라도 슬렁슬렁 걸어가 국밥 한그릇으로 쓰린 속을 사라지게 하듯 우울함을 사라지게 하는 재미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이제 쇠고기국밥집만 생기면 정말 행복할텐데)

by 감정의폭주족 | 2005/11/10 04:05 | 잡담 혹은 농담 | 트랙백(1) | 덧글(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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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내 인생은 ...ing.. at 2005/11/10 10:20

제목 : 국, 국밥
박언니^^님의 새벽잡담-슬렁슬렁 걸어가 국밥 한 그릇 비우다 저 글을 보고 있자니 더구나 아침을 먹지 않은 나로서는 입안에 침이 고이지 않을 수 없다. 난 국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뜨끈한 국물을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다 좋다. 미역국, 콩나물국, 된장국, 쇠고기국, 육개장, 닭개장(어머니께서 끓여주시는게 아주 일품이......more

Commented at 2005/11/10 06:3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5/11/10 06:4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5/11/10 07:4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5/11/10 08:0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5/11/10 08:4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불타는이단옆차기 at 2005/11/10 09:20
ㅎㅎ 국물 한번 마시면서 쏙이 쏴~악 풀리는 느낌은 정말 좋지요 ^^
음.. 그런데 비공개 덧글들이 많군요 .. 무슨 일일까요?...
Commented by 감정의폭주족 at 2005/11/10 09:41
비밀글1/-_-
비밀글2/언제 서울 나오시면 국밥 한그릇 못 쏘겠습니까.^^
비밀글3/혼..혼날까요? 근데 뭐가 바보짓인지? ^^
비밀글4/이봐. 당신까지 왜 이래. 어이. 김.부.장 -_-
비밀글5/오늘 점심은 국밥 한그릇으로^^
불타는이단옆차기/에. 박언니검색놀이에 이어 비공개 댓글달기가 유행인 모양입니다. -_-
Commented by 바다에빠진하늘 at 2005/11/10 09:46
진짜 이거 보니까 국밥이 마구 먹고 싶어지네요. 그럼 저도 밤새 달리고 다음 날 국밥 먹는 재미를 느껴야 할까요? 후후. 정말 국밥 한 그릇에 너무 행복해 보이세요~^^
Commented by SOOK at 2005/11/10 10:04
모주!! 아아 그립네요 고등학교은사님이 졸업하구 정말 모주가 맛난 국밥집에 데려가주신적있는데 그집이 지금은 없어졌더라구요 ㅡ.ㅜ
Commented by MickeyNox at 2005/11/10 10:11
엉엉엉 전주 자고 자퍼 엉엉엉 한달 전에 댕겨왔는데도 또 가고 싶잖아요 엉엉엉
Commented by 징소리 at 2005/11/10 10:20
으윽... 심각하게 땡겨요..;ㅁ;
Commented at 2005/11/10 10:4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도로시 at 2005/11/10 11:29
우리; 쇠고기 국밥집으로 업종 변경 어때요? (대박칠 것 같은데;;)
Commented at 2005/11/10 11:5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머미 at 2005/11/10 12:12
대체 홍대 주차장 골목에 콩나물국밥집이 어디 있나요? 서울에선 당최 제대로 된 콩나물국밥을 먹어 본 기억이 없어서...
Commented by 감정의폭주족 at 2005/11/10 13:32
바다에빠진하늘/밤새 달리고 국밥먹는 재미는 정말^^
SOOK/모주 맛난 집 드문데 아쉽네요.
정박/ㅎㅎㅎ 한번 다녀 올까?
징소리/^^
비밀글1/ Prometeus 님 안그러셨잖아요. -_-
도로시/고민좀 해보자. ^^
비밀글2/많이 바쁜 건 아닌데^^ 정말 술 한잔 할까요?
머미/그나마 신림동 완산정이 전주식인데 거기야 가보셨을테니 머미님 입맛에 맞는 국밥집 찾기가 쉽지 않을 듯 하네요.^^ 제가 가는 집은 근 10년째 다니는 집인데 주차장 골목에서 수노래방까지 오면 그 앞에 테이블 달랑 하나 있는 집이죠. 그 아줌마가 국밥팔아서 건물 샀다고 얼마나 소문이 자자한데요. ^^ 언제 한번 뵙고 술 한잔 한 후 국밥이나 먹으러 갈까요?
Commented at 2005/11/10 15:0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5/11/10 16:2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5/11/10 16:4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5/11/10 17:3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머미 at 2005/11/10 22:11
(1)술 한잔한 뒤 (2)국밥까지...는 제 실력에 좀 무리일 것 같고^^ 아무튼 (1)과 (2) 중 하나라도 조속한 시일 내에 해결합시다요.

얼마전 가본 전주에선 왱이집이 메이저로 떠올라 있더군요. 커다란 김 봉지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Commented at 2005/11/10 22:3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감정의폭주족 at 2005/11/11 08:07
비밀글1/아니 어느 동네 사시길래 그런 -_- 저는 병천순대도 좋아하지만 백암순대도 좋아합니다. ^^
비밀글2/저도 님 때문에 술안주로 먹고 싶은게 생겼어요. -_- 벌겋고.. 칼칼하고 맛난 술국이요..엉엉.
비밀글3/덧글 남기겠습니다. ^^
비밀글4/야. 너까지 왜이래, 같은 과끼리-_-
머미/서울에선 그렇게 김봉지 내 놓는 집 없을걸요. ^^ 그나저나 정말 조속한 시일안에 해결해야죠. ^^
비밀글5/어머나 실례라니요. ^^ 잘 도착했다니 다행입니다. ^^
Commented at 2005/11/11 09:0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감정의폭주족 at 2005/11/11 15:30
비밀글1/에. 아무도 주질 않던데요. -_-
비밀글2/넵. 좋은 하루^^
Commented at 2005/11/11 16:0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DEMON13 at 2005/11/12 06:01
아호~콩나물 국밥 먹고 싶어요.
Commented by 바다에빠진하늘 at 2005/11/12 10:18
어느새 주말이네요. ㅎㅎ 좋은 주말 보내세요^^
Commented by 시니컬콩 at 2005/11/12 10:20
쇠고기국밥집까지 생기면 그야말로 매일매일 술만 드시겠군요.
건강 생각을 좀 하심이... ^^;;
그런데 콩나물 국밥을 먹어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드시는 과정이 참 상세해서 신기해요. +_+
Commented at 2005/11/12 14:3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감정의폭주족 at 2005/11/12 15:24
비밀글1/한번 놀러오세요. 음 제대로 드시려면 일단 술을 드셔야 하는데^^
데몽이/놀러와. 술도 마시고 국밥도 먹자^^
바다에빠진하늘/넵. 님도.
시니컬콩/에 사실은 그냥 퍼먹는 건데 그걸 글로 쓰니 저렇더군요.^^
비밀글2/넵. 덧글남겼습니다.
Commented by 찬별 at 2005/11/12 21:44
콩나물국밥에도 스타일이 그렇게 많네요;
Commented at 2005/11/13 00:3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감정의폭주족 at 2005/11/13 02:12
찬별/사람 입맛이 다 틀리니까^^
비밀글1/ㅎㅎㅎ 그거야 만드는 사람 마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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